
나의 유일한 개발자였다는 기억을 남겨준 백준
어느 순간부터 나는 스스로를 개발자라고 소개하지 않게 되었다.
지금의 직무는 서비스 기획자이고, 매일 고민하는 것은 사용자 경험, 기능 구조, 운영 정책, 데이터 흐름, 그리고 수많은 협업 사이에서 더 나은 서비스를 만드는 일이다. 누군가는 말할 수 있다. “그럼 이제 개발자는 아니네.” 어쩌면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안에는 분명 아직도 개발자를 꿈꾸던 사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흔적을 가장 오래, 가장 꾸준히 붙잡아 준 곳이 있었다. 바로 백준 온라인 저지였다.
컴퓨터공학과를 나왔지만, 개발을 놓고 싶지 않았던 사람
나는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다.
수많은 전공 수업을 들었고, 자료구조와 알고리즘을 배우고, 운영체제와 데이터베이스를 공부했고, 팀 프로젝트를 하며 밤을 새운 적도 많았다.
그 시절의 나는 분명 개발자를 꿈꿨다.
코드를 짜는 것이 재밌었고, 내가 만든 무언가가 실행되는 순간의 짜릿함을 좋아했다. 작은 프로그램 하나라도 완성되면 괜히 뿌듯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현실적인 선택과 적성, 그리고 다양한 경험 속에서 나는 기획자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서비스를 설계하고, 유저를 이해하고, 문제를 구조적으로 해결하는 일 역시 나와 잘 맞았다. 그래서 지금의 길을 걷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개발을 완전히 놓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보낸 대학 시절과, 열심히 공부했던 시간들과, 분명 존재했던 “개발자였던 나”를 잊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꾸준히 찾게 된 곳, 백준
직장을 다니며 시간이 많지는 않았다.
하루 종일 일하고 돌아오면 지치기도 했고, 공부를 지속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틈틈이 백준 온라인 저지에 접속했다.
짧게는 한 문제, 길게는 두세 문제.
어떤 날은 쉬운 문제를 풀며 감을 유지했고, 어떤 날은 어려운 문제를 붙잡고 한참을 고민했다.
언어는 파이썬이었다.
누군가는 “실무 개발도 아닌데 왜 하냐”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나에게 코딩테스트 문제를 푼다는 건 단순히 문제풀이가 아니었다.
그건 내가 아직도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증거였고,
논리적으로 구조를 짜는 감각을 잃지 않았다는 확인이었으며,
무엇보다도 내가 아직 개발을 완전히 놓지 않았다는 안도감이었다.
“아직 나도 따라가려고 노력하고 있구나”
사회에 나오면 느끼게 된다.
세상에는 정말 잘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새로운 기술은 계속 나오고,
뛰어난 개발자들은 더 빠르게 성장하고,
나는 어느새 다른 길 위에 서 있다.
그럴 때마다 백준은 이상하게도 나를 위로해 주는 공간이었다.
문제 하나를 풀고 정답 판정을 받는 순간,
“그래도 아직 감각은 남아 있네.”
“아직 늦지 않았네.”
“나도 계속 따라가려고 노력하고 있구나.”
그 작은 초록색 정답 표시 하나가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내게는 꽤 큰 의미였다.
누군가에겐 단순한 코딩 사이트겠지만,
나에게는 스스로를 잊지 않게 해주는 쉼터였다.
실력이 늘고, 기록이 쌓이고, 포트폴리오가 되었다
처음에는 정말 가볍게 시작했다.
하루 한 문제라도 풀자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변화가 생겼다.
예전엔 한참 걸리던 문제를 더 빠르게 풀 수 있게 되었고,
막막했던 알고리즘 유형들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문제를 보는 시야가 넓어졌고, 사고하는 방식도 정리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록이 쌓였다.
맞은 문제 수, 티어, 제출 로그, 성장 그래프.
이 모든 것은 내가 흘려보낸 시간이 아니라, 분명 무언가를 쌓아 올리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나름대로 GitHub에도 정리해 두었다.
풀이 코드를 업로드하며 괜히 뿌듯했다.
누가 봐주지 않아도 좋았다.
그걸 스스로에게 보여주기 위한 기록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플래티넘이라는 티어에 도달해 있었다.
엄청난 고수의 상징은 아닐 수 있다.
더 높은 곳에는 훨씬 대단한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내게는 충분히 의미 있는 기록이었다.
개발자가 아닌 직무를 하면서도,
퇴근 후 시간을 쪼개고, 주말에 문제를 풀고,
지치고 귀찮은 날에도 다시 로그인하며 만든 결과였다.
누군가는 숫자 하나로 보겠지만,
나에게 플래티넘은 노력의 흔적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완전히 멀어진 게 아니었다.”
라는 증명이기도 했다.
데이터가 날아간다는 소식을 들으며
그렇게 쌓아둔 기록들이 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생각보다 마음이 이상했다.
단순한 사이트 데이터일 뿐인데,
왜 이렇게 아쉬울까 싶었다.
아마 그 안에는 단순한 점수나 티어가 아니라,
그 시절의 내가 함께 저장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야근 후 피곤한 밤에 한 문제 풀던 나.
주말 카페에서 집중해서 구현 문제 붙잡던 나.
이직 준비하며 다시 알고리즘 감각 끌어올리던 나.
개발자가 아닌 삶을 살면서도 개발을 놓고 싶지 않았던 나.
그 모든 시간이 그 기록 안에 있었다.
문제들 속에는 누군가의 추억도 있었다.
백준 온라인 저지의 문제들을 보다 보면 재미있는 순간들이 많았다.
어떤 문제는 학교 수행평가 같았고,
어떤 문제는 누군가의 장난 같은 아이디어였고,
어떤 문제는 특정 시대의 인터넷 감성이 느껴졌다.
마치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기억과 취향과 유머를 문제라는 형태로 남겨둔 느낌이었다.
그래서 단순한 알고리즘 사이트 이상으로 느껴졌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흔적들이 모인 아카이브 같았다.
이제 나는 조금씩 프로그래머스로 넘어가려 한다.
새로운 환경에서 다시 문제를 풀고,
새로운 기록을 쌓고,
다른 방식으로 성장하게 되겠지.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아쉽다.
오래 다닌 동네를 떠나는 기분이랄까.
익숙한 UI, 익숙한 제출 버튼, 익숙한 판정 화면 그리고 내가 남겨둔 시간들.
그래도 남는 건 기록보다 시간이다.
생각해 보면 데이터는 사라질 수 있다.
계정도, 티어도, 제출 로그도 언젠가는 없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그 시간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여전히 배우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나는 지금 기획자다.
하지만 동시에, 한때 개발자를 꿈꾸었고 지금도 기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나를 가장 잘 이해해 준 공간이 있었다면,
그건 아마 백준 온라인 저지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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